쉬운 일 아니에요
It's Not Easy

정멜멜 블로그
쉬운 일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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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연말결산

올해의 큰일 : 이전의 연말 결산들을 다시 읽으며 비교해 보니 확실히 2024년은 큰 변화가 많았다. 

큰일 ❶ 옮긴 것 
10년 정도 지낸 종로구에서 서대문구로 작업실을 옮겼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앞으로도 호리존 촬영의 비중을 늘릴 일이 없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이내에 있는 업무 공간을 가져 보는 것이 처음인데 생각보다 만족도가 높다.  인스타그램에도 몇 번 언급한 적 있지만 집 - 작업실 - 운동하는 곳을 가까운 동선으로 묶는 것이 오랜 염원이었는데 여러 조건이 잘 맞았다. 6년간 사용한 연건동 작업실은 촬영 공간을 만드느라 워낙 대공사를 하며 들어갔기 때문에 이번에는 ‘쓸데없는 공사 하지 않기’ 와 ‘쾌적한 데스크 업무 환경을 조성하기’ 를 목표로 했다. 모션 데스크 말고는 새로운 가구는 거의 구입하지 않았다. 


큰일 ❷ 정리한 것  
부업이었던, 8년 정도 운영해온 텍스처 숍 을 정리 했다. 이 활동에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분명 있었지만, 과중한 업무로 오래전부터 오프라인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코로나 직전 온라인 판매를 병행하기 시작했지만 (생각해 보니 굉장한 타이밍이었다), 이 역시도 꾸준히 이어나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쇼룸을 겸할 수 없는 크기의 공간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마무리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3일간 진행한 마지막 마켓에는 정말 많은 분들이 가파른 4층까지 와주시고, 인사해 주셔서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기대를 한참 넘는 인파와 마지막 매출이었고, 짐도 거의 다 처분해 아주 가볍게 이사를 올 수 있었다. 그런데 고별 마켓 이후 이상하게도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계속 늘고 있다. 의문의 1.5만 돌파···


큰일 ❸ 새롭게 시작한 것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올루 올루 를 시작했다.  작년 연말 결산에도 짧게 언급했던 바로 그 프로젝트로··· 우리 스튜디오는 그동안과는 또 다른 종류의 에너지와 좌충우돌을 아주··· 만끽하고 있다. ‘올루 올루를 시작했다' 라는 한 문장 안에 새롭게 시작해 본 일 50개 정도가 녹아 있다 보니 이런저런 소회가 (당연히) 있지만, 너무 길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생략한다. 여기 저기 너무 많이 말하고 다니기도 했고··· 올루 올루에 대해서는 엘르 / 어라운드 / 디퍼 와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새로이 또 해보게 된 일 중  하나는 ‘부끄러움 참고 사진 찍히기’ 도 있다. 그동안 거의 모든 대면 인터뷰를 거절해왔지만, 막상 섭외를 하는 입장이 되니 생각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시간이 되는 한 수락했다. 다른 사람의 렌즈 앞에 서는 일은 생각보다 촬영자 자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아주 많이. 지큐 / 엘르데코 를 통해 인터뷰를 하며 내가 찍히거나 집이 찍혔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태어나 가장 많은 인터뷰를 한 해로 기억될 것··· 나도 나이를 먹어서인지 한 시절이 이렇게 글로, 사진으로 남고 고정되는 것이 처음으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찍어왔는데 누군가를 찍기만 할 때는 몰랐던 감정이다.


올해의 건강 : 기쁨과 슬픔이 모두 있는데, 일단 기쁨은 작년에 비해 약간의 체중 감량을 했다는 것. 슬픔은 피해오던 두 번째 코로나에 기어코 걸린 것. 다행히 명절 직전 한가한 시기라 푹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잠깐 지나가는 후유증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가을, 겨울에는 가벼운 천식 증상이 올라온다는 것도 이제는 인정해야만 한다. 낡아갈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예상치 못한 구석이 고장이 나버리는 이 몸이란 것···

올해의 운동 : 가장 오래 했던 운동인 필라테스는 잠시 대기 상태로 있다 흐지부지 그만두었고, 봄쯤 새로운 PT 숍에 등록했다. 결정 이유가 좀 이상한데, 나와 선생님의 동일 병력이었다. 우리는 종종 수업 시간 도중 “건강으로 인해 인생/몸이 갑자기 멈춰버리는 경험"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 운동을 배우는 일이 나에게는 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올해의 소비 : 크게 기억나는 것은 없다. (돈을 많이 아꼈다는 뜻은 아님···) 
올해의 뿌듯함 : 운동, 독서, 취미에 들이는 시간에 대해  ‘아깝다’ 거나 ‘이 시간에 일을···' 같은 생각을 갖지 않으려 노력했고 어느 정도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예전에 비해서’일지라도. 

올해의 쓰기 : 연초에는 베터에서 <PHOTO BOOK PHOTO> 라는 사진책을 소개하는 연재를 했고, 라이프 집에 <언젠가 내게 말을 걸어올 물건을 산다> 라는 짧은 에세이를 실었다. 이훤의 새 책 <눈에 덜 띄는> 에도 추천사를 썼다. 그리고 늘 그렇듯 트위터에 헛소리들을 다량 썼다.

올해의 책 :  존 케닉 <슬픔에 이름 붙이기>, 데이비드 베이트 <사진의 주요 개념> (다소 따분한 이론서일 거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재밌었다), 호영 <전부 취소>, 이옥선 <즐거운 어른>  (에세이들 중 참 좋았다) 그리고 즐거운 어른을 읽으며 생각나서 다시 읽은 어슐러 K. 르 귄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다시 읽어도 진짜 좋다. 70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옥선 작가님과 80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어슐러 르 귄··· 거침없고 유머러스한 어른들에게 사랑을 바칩니다. 매년 올해의 책을 떠올려 볼 때는 사놓고 읽지 못한, 올해의 책이 될 수 있었던, 수많은 좋은 책들··· 에게 정말 큰 부채감을 느낍니다··· (끊임없는 말줄임표) 
올해의 영화 : <룸 넥스트 도어> 의외로 그동안 전혀 관심 없던 배우였던 줄리언 무어의 얼굴에 집중하면서 봤다. 

올해의 밑줄 : 한강 작가님의 노벨상 수상 연설 전문. 2024년도 타인의 문장들에 역시나 많이 기대고 밑줄을 그었지만 올해는 정말 이 문장들만 남겨도 충만하기에.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중략)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올해의 음식 : 요리책 <풍미 마스터 클래스> 촬영을 하면서 먼저 맛볼 수 있었던 여러 요리들. 그 중에서도 유부 소보로 소바를 참 좋아했다. 나중에 직접 만들어 먹기도.  화자오에 참깨와 흑후추, 설탕과 소금을 넣어 갈아 만든 파우더도. 생일 저녁에 갔던 테판도 좋았다. 음식도, 음식을 만드는 분들의 숙련된 손짓과 움직임도.


올해의 음료 : 카푸치노. 여전히 빠져있다. 원래도 좋아했지만 가을 이후는 거의 고민 없이 어딜 가도 카푸치노를. 새로운 카페에서 맛보지 못한 카푸치노 주문해 먹어보는 거 너무 좋고··· 그리고 사러가 마트의 레몬 딜 막걸리는 아마 내년까지 이어질 사랑하는 술. 이 술을 시작으로 나는 이런저런 막걸리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고 의외로 와인보다 잘 맞다. 산미가 느껴지는 과천도가의 숲으로나 걸쭉한 고택 찹쌀생주가 취향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올해의 숙취약은 RU21···

올해의 도시 : 올해는 정말 부산을 유난히 많이 갔다. 짧은 여행으로도, 일로도. 언제 가도 너무 좋다. 부산은. 


올해의 중고 : 전혀 계획에 없었지만 서촌 아르키스토에 방문했다가 구입한 Lukki Stool. 날렵한 모습, 먼지 낀 듯한 하늘색이 마음에 든다. 

올해의 공간 :  텍스처 숍의 물건들을 멋진 안목으로 골라주시던 동료의 어머니는 고별 세일을 끝내고 부산으로 돌아가 집 근처 작은 공간을 계약했다. 바탕 소, 재료 재, 뜰 원. <소재원> 이라는 이름의 3평 남짓 작은 가게. 어머니를 보며 나는 내가 30, 40년 후에 낼 수 있는 용기의 종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올해의 슬픔 :  굳이 굳이 찾자면 올해도 여행을 갈 여력이 전혀 없었다 정도일까··· 하지만 애써 설명하기도 전에 그런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해 주는 이들, 먼저 호진의 안부를 물어주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슬픔 이상의 고마움을 느꼈기에 대단치 않다.   

올해의 기쁨 : 호진의 상태가 상당히 호전된 것, 택수가 여전히 건강한 것. 스튜디오 구성원들 모두 건강에 별 탈 없이 한 해를 건너온 것. 여러 변화에 무사히 적응한 것. 그리고 역시 올해의 분노는 계엄령과 그 일련의 여러··· 


전반적으로 바빴고, 일도 많이 했고, 일 아닌 것도 많이 했다. 올해는 순전히 재미로 몇 년간 드문드문 들여다보던 명리학 공부에 좀 더 몰입해 봤다. 그리고 새로운 만남이나 관계에 인색해지거나 움츠려들지 않으려 했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새로 만나고, 혹은 알던 사람들을 새롭게 이해하며 보낸 한 해였다. (이 자리를 빌려 참 좋았다는 말을 전합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나 자신을 또 새롭게 알게 되기도 함··· 새로무새의 연말 결산··· 아무튼, 갑진년 나의 세운歲運 을 스스로 풀이해 봤을 때 혹시 이렇게 보내지 않을까? 싶었던게 있었고, 실제로 어느 정도 그렇게 흘러갔다. 혹은 그 해석을 의식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내가 방향을 조정한 것일 수도 있다. 

안해본 것을 대하는 태도도 좀 달랐다. 하되, 가능한 흐름에 몸을 맡겨 보았다. 안해본 일이라도 하기 싫거나 할 수 없는 일은 과감하게 뛰어들지 않았다. 가끔은 욕심을 내려놓는것도, 포기도 또 다른 종류의 용기라는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선택들의 결과나 여파를 아직 당장은 알 수 없겠지만···

2024년에 서툴게나마 몸에 익히게 된 어떤 마음가짐이나 자세들을 앞으로도 유지할 수 있을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현상에 불과할지는 또 어느 정도의 시간을 흘려보내며 살아봐야만 조금씩 알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연말결산

올해의 큰일 :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뒤섞인 한 해였다. 어느 해는 안 그랬나 싶지만 유독. 여름부터 시작된 빗물 역류 현상과 이로 인한 아파트 관리사무소 측과의 치열한 논쟁, 엉망이 된 부엌과 거실 재공사,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호진 간병. 그리고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는 일 A,  그리고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는 일 B, 그리고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는 일 C 등등. 자잘하거나, 크거나, 자잘한 줄 알았는데 커져버린 문제들이 여러 번 나와 가족과  동료들을 심각하게 지치게 했다. 그럼에도 올해 내게 가장 큰 의미를 가져다준 일을 하나만 남기자면 몇 년간 마음속으로 또 머릿속으로 열망하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새롭게 무언가를 해보기 위해 했던 다종다양한 일들이 우리를 여러 번 일으켜 세웠다.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고, 응원을 받았고, 또 여전히 받고 있고, 항상 뿌옇기만 하던 사진에 대한 생각들을 내 안에서 재미있게 굴려볼 수 있었다. 

올해의 건강 : 코로나 재감염을 피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대체적으로 좋았다가 10월에 긴 감기에 걸려 고생했다. 한 달을 꽉 채워 앓았다. 

올해의 운동 : 필라테스를 쭉 했지만 담당 강사님의 독립 선언으로 개업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연초에 매일 나가 평균 한 시간 걷기 100일 에 도전했고 성공했지만 하반기까지 습관이 이어지지 못했다.
올해의 소비 :  로봇 청소기. 그리고 재택 비중이 늘어 고민 끝에 집에 둘 에어론을 하나 더 샀다. “살림과 건강에 도움이 되는 도구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는 점점 내 안에서 확고한 진리가 되어가고 있다. 그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사실도···

올해의 뿌듯함 : 가을부터 매일 일기를 썼다. 짧지 않게. 기록은 운동과 같아서 처음엔 귀찮고, 꼭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을 참고 꾸역 꾸역 하면 근력이 붙는다. 결국 나 좋으라고 하는 일이라는 것도.

올해의 도시 : 오랜만에 다시 찾은 거창. 너무 좋았지 뭐.


올해의 책 : 류이치 사카모토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해나 개즈비 <차이에서 배워라>. 공통점이 있다면 저자에 대한 호감으로 구입했고, 꽤 두꺼웠고, 그럼에도 둘 다 읽는 속도가 빨랐던 책들. 
올해의 영화 : <괴물>. 단순히 ‘좋다’, ‘아름다웠다’ 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없지만 오래 마음 안에서 맴돌았던 영화였다. 올해는 거의 류이치 사카모토와 그의 죽음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도 있을 것이다. “영화 감독의 특권은 음악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것” 이라는 김혜리 기자님의 말씀을 곱씹었다.

올해의 밑줄 :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인터뷰, 동물 행동/노화 관련 책을 많이 읽었다. 유난히 소설을 읽지 않았던 해이기도. 

신실한 관찰자만이 사심 없이 예술가들을 지지할 수 있고, 뜨겁게 응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윤혜정>

연대자의 위치에 선 사람은 ‘나는 내 일도 아닌데도 대의에 복무하고 있어’라는 알량한 자기 만족감이나 시혜적인 태도를 경계하고 운동에 방해나 되지 않을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죠. 어떤 차원에서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였다 하더라도 그 위치가 영속적인 것도 아니고, 한 차원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다른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가해자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그런 날이 있는 것 같아요.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 날. 언제까지 피해자의 자리에만 머무를 건데? 대체 어디까지 스스로의 사정을 봐줄 건데? 언제까지 우리가 힘을 가지지 못했음을 연민하기만 하고,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을 작정인데? 그런 질문이 끓어오르는 날이요.
<엄살원 : 밥만 먹여 돌려보내는 엉터리 의원, 안담, 한유리, 곽예인>

구달 박사는 동물들도 각각의 개성과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들도 동물 세계의 일원으로서 존중 받아야 한다는 신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도 ‘동물 세계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기뻐하자’고 말합니다.
<제인 구달 생명의 시대, 제인 구달>

딱히 다른 사람들의 인지를 바꾸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삼을 마음도 없고, 담담하게 스스로 만들고 싶은 음악을 꾸준히 만들어가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싶습니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류이치 사카모토>

살아 있는 상태를 잊어야 자연스럽게 살아진다. 죽고 싶어지면 살아 있는 상태를 의식하게 되기 때문에 그때부터 삶이 어색해진다.
<나는 왜 이렇게 웃긴가, 이반지하>


올해의 카페 :  특별히 새롭게 찾게 된 곳은 없었다. 늘 가던 곳을 갔고, 작년보다는 사장님들과 조금씩 더 이야기를 나누려고 노력했다. 뚤리가 문을 닫는 슬픈 소식도 있었다. 좋아하던 공간이 문을 닫을 때면 더 자주 들리지 못했음에 항상 후회가 된다. 올해 찾은 카페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접객은 연말에 찾은 운니동의 카페 ‘텅' 이었다. 거의 만석이고 아주 정신없는 상황이었는데도 침착하면서도 따스하게 환대해 주신 분이 기억에 남았는데 알고 보니 팔로잉하고 있던 분이었다. 뒤늦게 감사를 전했다.
올해의 음식 : 약 4개월 정도 부엌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요리를 자주 못했다. 힘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복구된 부엌에서 예전의 동선과 자주 쓰던 레시피를 기억해 내며 만들고 복구된 거실에서 먹은 솥밥이 올해의 음식. 맛보다도 의미상으로. 


올해의 음료 : 약간의 변주를 준 에스프레소들. 오렌지 잼이 올라가는 에스프레소나 피스타치오 페이스트 크림이 올라가는 콘 크레마 알 피스타치오 같은. 집 근처에 자주 찾을만한 에스프레소 바가 없고 워낙 카페인에 취약해 자주 맛보지 못하기에 더 애달픈 마음으로 골라보았다. 주량은 더 줄었다. 올해의 쁘띠 슬픔.

올해의 중고 : 선물로 받은 앙드레 소르네의 1인용 책상. 스케일이 조금 작은데 그게 좋다. 늘 길고 커다란 책상을 선호하고 구매해왔으므로. 사실은 책상에 앉아있을 때보다 멀리서 바라볼 때 더 좋다. 

올해의 공간 : 워크샵때 찾은 양양의 강아지와 함께 갈 수 있는 숙소.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눈에 가득 차도록 펼쳐진 곳이었다. 그것 말고는 평범한 숙소였는데 눈 앞 풍경이 다했다. 그 어떤 호화스러운 숙소보다 택수가 행복한 곳이 우리도 좋다. 


올해의 공연 : 이소라의 30주년 공연. “집에 있으면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아요, 나가고 싶은데 나가고 싶지 않아요, 무서워요. 얼굴 마주치고 사람 눈을 쳐다보는 게 어색해요. 이사 간 집에서 2년 만에 처음 밖으로 나온 날이 어제였어요. 야구는! 홈에서 나와서 홈으로 들어오는 일입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짝꿍이,  씽씽이, 라미’ 중 태어난 지 2년 조금 넘은 하얀 슈나우저 ‘짝꿍이’. 태어나서 한 번도 뽀뽀를 해준 적이 없었는데 어제 공연 끝나고 집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얘가 뛰어나와서 저한테 뽀뽀를 막 해주는 거예요. 처음으로! 아, 사람은 집에서 나와서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구나! 그래야 이런 좋은 일이 있는 거구나! 여러분이 오늘 공연에 와주셔서 제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어요.” 

올해의 슬픔 :  가을부터 호진의 컨디션이 눈에 띄게 나빠졌던 것. 나이가 나이인 만큼 마음의 준비를 평소에도 조금씩 하고 있었지만 내 반려동물의 생애 주기 마지막을 지켜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고, 여전히 그렇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에만 호진이와 나눌 수 있는, 느낄 수 있는 너무나 복잡하고 거대한 감정들이 있다.  어쩌면 그래서 매일 일기를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억하고 싶고 고통스러워도 똑바로 보고 싶다. 언젠간 길게 할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가능한 매일 매일에 충실해보기.  
올해의 기쁨 : 호진이 연이은 고비를 넘기며 함께 무사히 한 해를 건너온 것. 힘들 텐데 잘 버텨주고 있는 것. 그리고 이 지난할 과정을 신뢰하며 함께할 수 있는 좋은 병원, 좋은 선생님을 찾은 것.


올해의 기쁨 2 : 독서를 많이 했다. 특히 괴로울 때. 책도 읽었지만 기사, 인터뷰, 트위터 타임라인 등 허기진 사람처럼 닥치는 대로 읽었다. 텍스트에 매달렸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돌이켜보니 나름의 기쁨이었다. 

올해의 집착 :  재공사를 마치고 나서 한 달 가까이 청소, 정리, 수납에 집착했다. 거의 반쯤 미친 사람 같았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증언했고...  인정한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움직일 수 있었고 바로 바로 결과물이 보인다는 점이 허물어진 마음을 복원하는데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되었다.  

올해는 괄목할 만한 큰 성취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업무 범위를 줄이며 좋아하는 촬영들에 집중할 수 있었고, 늘 어렵던 업무 스트레스 관리 면에서도 조금은 기술이 생겼다. 시장에서의 나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했고, 그러다보니 무용한 고민이나 비교에서도 제법 멀어졌고, 때때로 찾아오더라도 가볍게 털어내기도 했다. 당연히 매일 그런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힘들었지만, 어떤 날은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출렁이는 감정들을 일에 기대기도 했다. 이 마음을 얼마나 갖고 싶었나. 그리고 얼마나 오래 걸렸나. 일과의 관계도 변한다. 노력하면 좋은 쪽으로도. 그 단서를 아주 약간은 발견한 것 같아 기억할 만한 해다. 그리고 이 마음에 다다르기까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오랜 배려와 응원, 협조와 애정이 있었음을 안다. 지긋지긋하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던 2023년이었지만 그렇게만 기억하며 넘어가고 싶지 않은 이유다. 절망과 고통을 체로 걸러내 겨우 겨우 내게 남겨진 한 줌의 배움들, 사랑들 꼭 잊지 않기로.  

2023년 10월, 11월, 12월의 메모들

23년 12월 9일.
12월이 미끄러지듯이 사라지고 있다. 호진이는 이제 매일 수액을 맞기로 했다.

23년  11월 23일.
새로운 프로젝트 촬영을 하면서는 찍을 때 어떤 걸 포기해야 하는지 억지스럽지 않으려면 뭐가 좋은지 자주 생각한다. 어쨌든 편안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현장의 모두가.

23년 10월 30일.
“부디 다 낫고 나서 왕성한 활동을 하십시오.” 오늘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에게 들은 일침. 주사보다 더 아팠네.

23년 10월 28일.
재능과 인성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 사이에 이격이 있어도 어떤 식으로 떼어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

23년 10월 3일
“나도 모르게 시작해버린 일, 그 앞에 내 일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몸을 바쳐 하고 있는 것들이 저를 새로운 길로 이끌죠. 인생이라든가 커리어의 다음 단계라는 것은, 계획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이 또 다른 충동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 하라 켄야” 나도 모르게 시작해 버린 일. 계속 내 안에 있는 일.

2022년 연말결산

올해의 큰일 :  역시 책 <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가 나온 것. 오래도록 진도를 내지 못했는데 연초에는 시간과 집중력을 쏟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인쇄 감리 날이었다. 사진집이 아닌 에세이라는 점에서 나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내 손을 떠나가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가끔은 더 조바심이 났고, 뭐 얼마나 특별한 반응이 있을까 싶었는데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사랑을 받았다. 모두 예상 밖의 일이었다.  출간 전 가장 걱정했던 북토크/사인회는 ‘책을 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분들과 눈을 맞 추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구나’ 를 크게 실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 중반 이후부터는 즐겁게 했다. 통의동의 이라선,  성산동의 사적인 서점, 서교동의 땡스북스, 자양동의 인덱스, 안산의 생활관, 대구의 낫온리북스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 스튜디오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볼 일이 많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추천도서 100선에 선정된 것도 기억에 남는다. 최근 3년 내 출간된 책을 후보로 했다는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이너 필링스>,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같은 책들과 함께라니 솔직히 너무 영광이고 어안이 벙벙해서 시상식장에서 갑자기 호명된 지현우 같은 표정을 내내 지으며 마음껏 자랑도 못했다.

책을 함께 만들어주신 분들, 북토크에 찾아오거나 후기를 남겨주신 분들, 시간을 내어 읽어주신 분들, 책을 준비하고 홍보하는 기간 동안 많은 부분을 배려해 준 나의 두 동료에게 모두 감사한 마음이다. 당분간은 다시 사진 찍는 사람으로 있고 싶어 책이나 원고 등의 제안은 모두 미련없이 거절했다. 대신 블로그를 좀 더 부담 없이 써야지, 애써 정리하지 말고 과하게 검열하지 말고 아무렇게나 내뱉기도 하고 솔직해져야지, 그런 마음이 있다. 

올해의 건강 : 작년엔 입원과 각종 검사까지 하면서 편두통을 잡아나갔고, 업무량을 조절하며 운동을 꾸준히 했기 때문인지 쭉 나쁘지 않다가 하반기에 무너졌다. 10월에 코로나에 걸리면서 다양한 후유증을 겪었다. 극심한 체력 저하, 면역력 저하, 입술포진, 천식, 기관지염 등등. 오미크론이 유행하던 시기에 주변에서 숱하게 걸렸기 때문에... 무뎌진 것도 있고 ‘언젠간 걸리겠지’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막상 걸리니 격리 기간에도 정말 호되게, 상상 이상으로 아팠다. 정말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바이러스임. 재감염이 두려워 당분간은 실내 마스크 해제가 되어도 마스크를 낄 예정이다.

올해의 운동 : 필라테스. 2021년 2월부터 등록해 다녔으니 곧 1년이 된다. 보통 주 2회, 가끔 3회, 아주 바쁠 때도 출장이나 여행으로 서울을 떠나있을 때가 아닌 이상 주 1회는 꼭 (울면서) 나갔다. 허리 통증이 정말 많이 사라졌는데 아마 필라테스 때문이 아닐까. 2023년의 목표 중 하나도 이것 저것 체력 단련 계획을 거창하게 세우기보다는 필라테스 꾸준히 하기다.

올해의 소비 :  올해의 크고 작은 소비는 보그 인터뷰 <the list - 요즘 가장 애정 하는 물건> 에 자세히 적었다. 자잘한 소비를 줄이고 차라리 돈을 모아 갖고 싶었던걸 사자는 전략을 세운 한 해였다. 과연 유효했는지? 크게도 쓰고 자잘하게도 쓴건 아닌지? 그 밖의 좋았던 소비는 워키토키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단어의 배열> 을 관람하러 갔다가 스스로에게 주는 생일 선물로 스툴을 구매한 것, 프론트 데스크에서 90년대에 생산된 이케아 빈티지 조명을 구매한 것. 


올해의 영화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조금 늦게 관람을 했기 때문에 친구들 말고는 아무도 없는 광활한 영화관에서 봤는데 그 경험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양자경도 좋았지만 키 호이 콴의 연기가 좋았다. 그리고 2번 본 <헤어질 결심>.

올해의 책 : 대니 샤피로의 <계속 쓰기 - 나의 단어로>.  yes24 에서 연말에 진행한 ‘작가 선정 올해의 책'에도 이 책을 소개했다. 무언가를 쓰는 것에 엄청나게 압박을 받은 해였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와닿았던게 아닐까 싶다. 

올해의 밑줄 : 좋은 문장들은 이 세상에 차고 넘치게 많지만, 확실히 지금의 나에게 와닿는 문장들을 부여잡기 마련인 듯 하다. 올해는 내향인에 대한 책, 그리고 창작자의 마음을 드러내는 책을 의도적으로 많이 읽었다. 많지만 기억나는 몇몇.

남들보다 예민한 신경 시스템은 종종 우리가 즐기고 있던 것을 떠나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할 것을 강요하지만, 한편으로는 남들보다 더 큰 기쁨을 경험하게 한다.
<센서티브, 일자 샌드>

내가 만난 어떤 여자 ‘개를 잃고 나니 세상에서 색깔 하나가 사라진 것 같다’고 했다. 개는 그녀 눈앞에 이전에는 없던 색조를 더했다.
<개와 나, 캐롤라인 냅>

말하자면 나는 애초에 내 인생을 눈치챘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그렇다. 어떤 경우에는 망한 인생도 재능이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인생이 망하지 않았는데 망했다고 느낄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망했는데 희망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 정지돈>

이미지는 항상 느낌이나 감정보다 우선하죠.
<아녜스 바르다의 말>


올해의 카페 :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기보다 여전히 롯지, 뚤리, 롱앤쇼트, 아이덴티티커피랩, 런어웨이에 가장 자주 간다. 삶의 질을 높여주는 집 근처의 좋은 카페들에게 늘 감사를. 작업실 근처 창경궁로의 미러볼 커피 스탠드에서는 좋은 가격으로 맛있는 라떼를 먹을 수 있어 택수와 산책 겸 간다. 권농동 커피 플레이스가 없어진 건 정말 슬펐다.  
올해의 음식 : 여행에서는 란사로테의 레스토랑 7hojas 에서 먹은 모든 음식들. 출장에서는 여수에서 먹은 회, 연포탕과 고구마 튀김 그리고 국밥. 서울에서는 푸드 실방과 제로 컴플렉스, 한남으로 이전한 레에스티우, 그리고 계향각에서의  식사가 좋았다. 롱위켄드의 디너 코스도. 그리고 창잉터우라고 부르는, 대만식 마늘쫑 볶음에 빠져 양밍산도 자주 갔다.
올해의 음료 : 램버트의 쇼콜라티에 포트 와인. 찾아보니 쉬라즈, 진판델, 샤도네이 3자기 품종을 압착하고 발효해 초콜릿 원액과 함께 숙성시킨다고 하는데 매년 약 7,000병만 생산되는 포트 와인이라고. 초콜릿과 먹으면 잘 어울린다. 그리고 여행 내내 달고 살았던 식전주 아페롤 스프리츠. 여태 프랑스 식전주로 알고 있었는데 이탈리아 식전주였다. 물론 나는 프랑스랑 스페인에서 들이켰지만...  

올해의 중고 : 여러 가지를 샀지만, 하나만 고르자면 이어령 선생님이 편저하셨다는 사전 <뉴 에이스 문장사전>. 김태경 편집장님이 인스타그램에 올리신 글을 보고 알게 된 사전으로, 절판되었지만 중고 서점에서  구할 수 있었다. 단어 하나하나에 관련된 명문장들을 어록과 시, 묘사로 나눠 수록했다. 엄청 두꺼운 사전이지만 책을 읽듯 즐겁다. 풍성한 예문들 앞에서 자꾸 멈춰 선다. 예를 들어 ‘언어' 라는 단어에는 총 54개의 문장들이 딸려있고 그 중 일부는 이런 문장이다.

단어의 총화가 지닌 지상 능력이
언어의 신성함을 밝혀준다.
말하고 있는 것은 언어의 기능 그 자체다.
말하여 취한다.
취해서 춤을 춘다.
<P. 발레리>

언어는 도시이다.
그 도시를 건설하는 데
만민이 돌을 들고 와서 참여했다.
<R. W. 에머슨>

이 더운 초록빛 그늘을 /
언어는 한 개 떨어지는 빗방울
<E. 시트웰>

어떤 단어를 찾아도, 목적어 없이 아무 페이지를 들춰도 놀라운 문장들이 기다리고 있다. 정말 빼곡하게 아름다운 책이 아닌지.  

올해의 공간 : 다신 갈 수 없다는 애틋함으로 밀레니엄 힐튼 호텔.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며 특히 연말에 많이 방문하는 듯 했다. 나는 연초에 다녀왔다. 강아지도 함께 할 수 있는 방이 있어서 택수도 갔다. 고전적인 장식들. 오래 사용해 반질거리는 가구들. 우아하고 묵직한 로비. 이곳이 영원할 것처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 없어지기 전에 계절마다 몇 번 더 가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대리석의 경우는 주종을 이루는 바닥, 그 로마 교외 티볼리에서 나는 돌인데, 그것이 엄청나게 중립적인 빛깔이기 때문에 다른 색채, 다른 재질, 그거하고 조화가 언제든지 잘 되는 이점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조돼가지고 이제 그 문을 들어서면 양옆을 구성하고 있는 녹색 대리석, 그거는 시간이 지나도 질리지가 않고 좀 영구적인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그런 재료이기 때문에 제가 그걸 좋아서 썼습니다.

사사건건 플러스, 1세대 건축가 김종성

1978년 설계를 시작해 1983년 개장한 밀레니엄 힐튼 호텔은 2022년 12월 31일 영업을 종료했다.
올해의 배움 : 올해는 필라테스 말고는 따로 수강료를 내고 배운 것이 없다. 위빙을 배우고 싶었으나 포기했고, 쿠킹 클래스도 몇 개 기웃거리다 마음을 접었다. 사주 공부는 쭉 하고 있다. 잠깐 의욕이 사그라들다가 또 다시 열의가 생기다가를 반복하면서. 내 사주는 불 위에서 돌덩이가 녹고 있는 형상이기 때문에 ‘멜멜' 이라는 이름이 나 그 자체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었다. 

올해의 도시 : 국외에서는 프랑스의 제네genêts. 국내에서는 경주와 안동. 확실히 번잡스럽지 않은 도시들을 좋아한다. 에어비앤비 하나만 보고 가게 된 제네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경주는 아빠의 고향이고 어릴 때 자주 방문했음에도 처음 가보는, 그리고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 좀 길게 다녀오면 좋겠다. 고청지 주변도 천천히 걷고, 새로 열린 경주박물관 서별관 도서관이랑 신라의 미소랑 토우도 보고. 향미사에서 커피를 마시고, 저녁에는 동네 산책 하듯 왕릉 사이 사이를 걷고.


올해의 사진집 : <What They Saw: Historical Photobooks By Women, 1843-1999>, <Look at me like you love me>. 그리고 소량 재입고 되었을 때 달려가 구입한 샤론 코어의 사진집. 루모스에서 열린 <2021 Paris Photo–Aperture Foundation PhotoBook Awards> 대구 에디션 전시를 보았는데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올해의 기쁨 :  국내를 많이 돌아다닌 것. 유난히 출장이 많은 해였다. 제주도는 5번 넘게 다녀왔고(세다가 포기), 남해와 대구와 부산과 경주는 두어 번, 안동, 여수, 강릉... 확실히 몸은 힘들었는데 좋았다. 

올해의 아쉬움 : 여러 도시를 돌아다닐 기회가 있었던 만큼 하루 이틀씩 붙여 관광을 더 하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쉬웠다. 내년엔 해외보다는 국내 여행을 더 느긋하게 다녀보고 싶다. 


올해의 슬픔 : 나 역시 코로나 후유증으로 적지 않은 고생을 했고,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건강 문제가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든지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올해의 다행 :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다행이다. 지금보다 더 나쁠 수도 있었고, 더 고꾸라질 수 있었고, 더 절망적일 수 있었다는걸 안다.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자주 하는 생각이다. 
2022년은 유난히 실체 없는 고민도 불안도 걱정도 많은 해였다. 휘청였고, 그 모습을 내보이고 싶지 않아 스스로를 숨겼다. 많은 말을 하고 싶다가도 아무 말을 않고 싶기도 했다. 일은 줄였지만 이전보다 훨씬 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우리 스튜디오에 있어 안정 그리고 성취는 무엇인지에 대해, 나의 한계와 쓸모에 대해. 그러나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한 해의 끝에 다다라 알기도 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도 자꾸 닳아 없어지기에 늘 새로 깨달아야 하는 그 마음. 사랑하는 사람들, 동물들이 무엇보다 건강하기를, 두렵지 않기를. 그렇지 못한 상황에 닿게 된다면 주저없이 내게 손을 내밀어 주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2022년 8월의 메모들

22년 8월 3일  
"I've never considered myself an activist I've never considered my relationship with Todd to be an act of activism. Rather simply, it's an act of love, coffee in the morning, going to work, washing the clothes, taking the dogs out -- a regular life, boring love."

15년간 만나온 연인과 결혼한 배우 짐 파슨스의 수상소감.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태도.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출근하고, 옷을 빨고, 개들을 데리고 나가고. 규칙적인 삶, 지루한 사랑.

22년 8월 15일
관종이긴 한데 뭔가가 결여된 관종이라 거절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일들. 수락하기엔 제가 또 그렇게까지··· 그렇지는 않아서요··· 아시잖아요. 애매한 것만큼 고통스러운 게 없다는 걸···

22년 8월 30일
“어느 추모 시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부재 속에서도 존재한다’ 라는 구절을 읽었어요.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이 세상에, 그리고 내 곁에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평소에 많이 생각하잖아요? 제 경우도 이미 없는 이에 대한 생각이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해요. 부재하지만 제 생각 속에서는 공존하고 있는 것이죠. 인생이란 어느 나이고 다 살 만한 거예요. 나는 한 발은 이미 무덤에 들어가 있는 사람인데 내 인생에 대해 지금도 만족하고 있어요. 남아 있는 나날을 여태껏 살았듯이 죄짓지 않고 좋은 사람 자주 만나면서 살면 그뿐이죠. 난 내일 죽는다 해도 오늘 웃을 수 있어요. 부재 속에서도 나의 글은 다른 이들의 생각 속에 존재하게 되겠지요. (중략) 제 경우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게는 되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글, 특히 <한 말씀만 하소서> 는 읽을때마다 15년 정도 빨리 읽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소중한 이가 부재하는 세상도 다시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만 구태어 숨기지 않겠다는 말이··· 이전의 나를, 지금의 나를, 그리고 앞으로의 나를 얼마나 위로하는지.
정멜멜
서울에서 동료들과 스튜디오 텍스처 온 텍스처를 운영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비인간동물과 그들의 반려인, 보호자, 활동가와 후원자를 사진과 대화로 기록하는 올루 올루를 이어간다. 
melmel chung
member of texture on texture,  a small team of professional photographers based in seoul.

Olu Olu continues to document non-human animals and their companions, guardians, activists, and supporters through photographs and conversations.









정멜멜은 서울에서 동료들과 스튜디오 텍스처 온 텍스처를 운영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비인간동물과 그들의 반려인, 보호자, 활동가와 후원자를 사진과 대화로 기록하는 프로젝트 올루 올루를 이어간다.  인스타그램 @meltingfra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