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일 아니에요
It's Not Easy

정멜멜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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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연말결산

올해의 큰일 : 이전의 연말 결산들을 다시 읽으며 비교해 보니 확실히 2024년은 큰 변화가 많았다. 

큰일 ❶ 옮긴 것 
10년 정도 지낸 종로구에서 서대문구로 작업실을 옮겼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앞으로도 호리존 촬영의 비중을 늘릴 일이 없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이내에 있는 업무 공간을 가져 보는 것이 처음인데 생각보다 만족도가 높다.  인스타그램에도 몇 번 언급한 적 있지만 집 - 작업실 - 운동하는 곳을 가까운 동선으로 묶는 것이 오랜 염원이었는데 여러 조건이 잘 맞았다. 6년간 사용한 연건동 작업실은 촬영 공간을 만드느라 워낙 대공사를 하며 들어갔기 때문에 이번에는 ‘쓸데없는 공사 하지 않기’ 와 ‘쾌적한 데스크 업무 환경을 조성하기’ 를 목표로 했다. 모션 데스크 말고는 새로운 가구는 거의 구입하지 않았다. 


큰일 ❷ 정리한 것  
부업이었던, 8년 정도 운영해온 텍스처 숍 을 정리 했다. 이 활동에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분명 있었지만, 과중한 업무로 오래전부터 오프라인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코로나 직전 온라인 판매를 병행하기 시작했지만 (생각해 보니 굉장한 타이밍이었다), 이 역시도 꾸준히 이어나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쇼룸을 겸할 수 없는 크기의 공간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마무리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3일간 진행한 마지막 마켓에는 정말 많은 분들이 가파른 4층까지 와주시고, 인사해 주셔서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기대를 한참 넘는 인파와 마지막 매출이었고, 짐도 거의 다 처분해 아주 가볍게 이사를 올 수 있었다. 그런데 고별 마켓 이후 이상하게도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계속 늘고 있다. 의문의 1.5만 돌파···


큰일 ❸ 새롭게 시작한 것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올루 올루 를 시작했다.  작년 연말 결산에도 짧게 언급했던 바로 그 프로젝트로··· 우리 스튜디오는 그동안과는 또 다른 종류의 에너지와 좌충우돌을 아주··· 만끽하고 있다. ‘올루 올루를 시작했다' 라는 한 문장 안에 새롭게 시작해 본 일 50개 정도가 녹아 있다 보니 이런저런 소회가 (당연히) 있지만, 너무 길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생략한다. 여기 저기 너무 많이 말하고 다니기도 했고··· 올루 올루에 대해서는 엘르 / 어라운드 / 디퍼 와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새로이 또 해보게 된 일 중  하나는 ‘부끄러움 참고 사진 찍히기’ 도 있다. 그동안 거의 모든 대면 인터뷰를 거절해왔지만, 막상 섭외를 하는 입장이 되니 생각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시간이 되는 한 수락했다. 다른 사람의 렌즈 앞에 서는 일은 생각보다 촬영자 자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아주 많이. 지큐 / 엘르데코 를 통해 인터뷰를 하며 내가 찍히거나 집이 찍혔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태어나 가장 많은 인터뷰를 한 해로 기억될 것··· 나도 나이를 먹어서인지 한 시절이 이렇게 글로, 사진으로 남고 고정되는 것이 처음으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찍어왔는데 누군가를 찍기만 할 때는 몰랐던 감정이다.


올해의 건강 : 기쁨과 슬픔이 모두 있는데, 일단 기쁨은 작년에 비해 약간의 체중 감량을 했다는 것. 슬픔은 피해오던 두 번째 코로나에 기어코 걸린 것. 다행히 명절 직전 한가한 시기라 푹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잠깐 지나가는 후유증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가을, 겨울에는 가벼운 천식 증상이 올라온다는 것도 이제는 인정해야만 한다. 낡아갈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예상치 못한 구석이 고장이 나버리는 이 몸이란 것···

올해의 운동 : 가장 오래 했던 운동인 필라테스는 잠시 대기 상태로 있다 흐지부지 그만두었고, 봄쯤 새로운 PT 숍에 등록했다. 결정 이유가 좀 이상한데, 나와 선생님의 동일 병력이었다. 우리는 종종 수업 시간 도중 “건강으로 인해 인생/몸이 갑자기 멈춰버리는 경험"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 운동을 배우는 일이 나에게는 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올해의 소비 : 크게 기억나는 것은 없다. (돈을 많이 아꼈다는 뜻은 아님···) 
올해의 뿌듯함 : 운동, 독서, 취미에 들이는 시간에 대해  ‘아깝다’ 거나 ‘이 시간에 일을···' 같은 생각을 갖지 않으려 노력했고 어느 정도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예전에 비해서’일지라도. 

올해의 쓰기 : 연초에는 베터에서 <PHOTO BOOK PHOTO> 라는 사진책을 소개하는 연재를 했고, 라이프 집에 <언젠가 내게 말을 걸어올 물건을 산다> 라는 짧은 에세이를 실었다. 이훤의 새 책 <눈에 덜 띄는> 에도 추천사를 썼다. 그리고 늘 그렇듯 트위터에 헛소리들을 다량 썼다.

올해의 책 :  존 케닉 <슬픔에 이름 붙이기>, 데이비드 베이트 <사진의 주요 개념> (다소 따분한 이론서일 거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재밌었다), 호영 <전부 취소>, 이옥선 <즐거운 어른>  (에세이들 중 참 좋았다) 그리고 즐거운 어른을 읽으며 생각나서 다시 읽은 어슐러 K. 르 귄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다시 읽어도 진짜 좋다. 70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옥선 작가님과 80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어슐러 르 귄··· 거침없고 유머러스한 어른들에게 사랑을 바칩니다. 매년 올해의 책을 떠올려 볼 때는 사놓고 읽지 못한, 올해의 책이 될 수 있었던, 수많은 좋은 책들··· 에게 정말 큰 부채감을 느낍니다··· (끊임없는 말줄임표) 
올해의 영화 : <룸 넥스트 도어> 의외로 그동안 전혀 관심 없던 배우였던 줄리언 무어의 얼굴에 집중하면서 봤다. 

올해의 밑줄 : 한강 작가님의 노벨상 수상 연설 전문. 2024년도 타인의 문장들에 역시나 많이 기대고 밑줄을 그었지만 올해는 정말 이 문장들만 남겨도 충만하기에.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중략)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올해의 음식 : 요리책 <풍미 마스터 클래스> 촬영을 하면서 먼저 맛볼 수 있었던 여러 요리들. 그 중에서도 유부 소보로 소바를 참 좋아했다. 나중에 직접 만들어 먹기도.  화자오에 참깨와 흑후추, 설탕과 소금을 넣어 갈아 만든 파우더도. 생일 저녁에 갔던 테판도 좋았다. 음식도, 음식을 만드는 분들의 숙련된 손짓과 움직임도.


올해의 음료 : 카푸치노. 여전히 빠져있다. 원래도 좋아했지만 가을 이후는 거의 고민 없이 어딜 가도 카푸치노를. 새로운 카페에서 맛보지 못한 카푸치노 주문해 먹어보는 거 너무 좋고··· 그리고 사러가 마트의 레몬 딜 막걸리는 아마 내년까지 이어질 사랑하는 술. 이 술을 시작으로 나는 이런저런 막걸리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고 의외로 와인보다 잘 맞다. 산미가 느껴지는 과천도가의 숲으로나 걸쭉한 고택 찹쌀생주가 취향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올해의 숙취약은 RU21···

올해의 도시 : 올해는 정말 부산을 유난히 많이 갔다. 짧은 여행으로도, 일로도. 언제 가도 너무 좋다. 부산은. 


올해의 중고 : 전혀 계획에 없었지만 서촌 아르키스토에 방문했다가 구입한 Lukki Stool. 날렵한 모습, 먼지 낀 듯한 하늘색이 마음에 든다. 

올해의 공간 :  텍스처 숍의 물건들을 멋진 안목으로 골라주시던 동료의 어머니는 고별 세일을 끝내고 부산으로 돌아가 집 근처 작은 공간을 계약했다. 바탕 소, 재료 재, 뜰 원. <소재원> 이라는 이름의 3평 남짓 작은 가게. 어머니를 보며 나는 내가 30, 40년 후에 낼 수 있는 용기의 종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올해의 슬픔 :  굳이 굳이 찾자면 올해도 여행을 갈 여력이 전혀 없었다 정도일까··· 하지만 애써 설명하기도 전에 그런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해 주는 이들, 먼저 호진의 안부를 물어주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슬픔 이상의 고마움을 느꼈기에 대단치 않다.   

올해의 기쁨 : 호진의 상태가 상당히 호전된 것, 택수가 여전히 건강한 것. 스튜디오 구성원들 모두 건강에 별 탈 없이 한 해를 건너온 것. 여러 변화에 무사히 적응한 것. 그리고 역시 올해의 분노는 계엄령과 그 일련의 여러··· 


전반적으로 바빴고, 일도 많이 했고, 일 아닌 것도 많이 했다. 올해는 순전히 재미로 몇 년간 드문드문 들여다보던 명리학 공부에 좀 더 몰입해 봤다. 그리고 새로운 만남이나 관계에 인색해지거나 움츠려들지 않으려 했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새로 만나고, 혹은 알던 사람들을 새롭게 이해하며 보낸 한 해였다. (이 자리를 빌려 참 좋았다는 말을 전합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나 자신을 또 새롭게 알게 되기도 함··· 새로무새의 연말 결산··· 아무튼, 갑진년 나의 세운歲運 을 스스로 풀이해 봤을 때 혹시 이렇게 보내지 않을까? 싶었던게 있었고, 실제로 어느 정도 그렇게 흘러갔다. 혹은 그 해석을 의식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내가 방향을 조정한 것일 수도 있다. 

안해본 것을 대하는 태도도 좀 달랐다. 하되, 가능한 흐름에 몸을 맡겨 보았다. 안해본 일이라도 하기 싫거나 할 수 없는 일은 과감하게 뛰어들지 않았다. 가끔은 욕심을 내려놓는것도, 포기도 또 다른 종류의 용기라는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선택들의 결과나 여파를 아직 당장은 알 수 없겠지만···

2024년에 서툴게나마 몸에 익히게 된 어떤 마음가짐이나 자세들을 앞으로도 유지할 수 있을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현상에 불과할지는 또 어느 정도의 시간을 흘려보내며 살아봐야만 조금씩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멜멜
서울에서 동료들과 스튜디오 텍스처 온 텍스처를 운영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비인간동물과 그들의 반려인, 보호자, 활동가와 후원자를 사진과 대화로 기록하는 올루 올루를 이어간다. 
melmel chung
member of texture on texture,  a small team of professional photographers based in seoul.

Olu Olu continues to document non-human animals and their companions, guardians, activists, and supporters through photographs and conversations.









정멜멜은 서울에서 동료들과 스튜디오 텍스처 온 텍스처를 운영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비인간동물과 그들의 반려인, 보호자, 활동가와 후원자를 사진과 대화로 기록하는 프로젝트 올루 올루를 이어간다.  인스타그램 @meltingframe